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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에게 거는 최면

가을을 반납했다는 G 작가의 글을 접하고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시간과 계절을 내려놓았을까? 암 투병과 함께 지긋지긋한 통증에 약효가 점점 짧아지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통증이 가시면 글을 쓰고 있다는 G 작가를 마음으로나마 응원하고 있다. 가을을 반납하고서라도 써야 할 그 무엇에 박수를 보낸다. 아무쪼록 그 글의 완성이 책으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이 온다   우수수 낙엽이 날려도 먼동이 트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햇살이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누군가는 짙은 커피 향에 취해   떠나는 계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그리울 때 갈대는 땅으로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꿈과 현실의 갈래길에서 한길을 택해   언덕을 내려오다 쓰러진 나무를 보았다   거기 나는 속이 텅 빈 나무처럼 땅으로 눕는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꿈은 꿈 자체로 아름답다. 기쁨과 슬픔의 조건조차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 내면의 의식에서 빚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상의 결과가 그 가치를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함부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한다거나 스스로의 삶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본다. 늘 사람을 대할 때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수평적인 사고로 대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망이 아닐까 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직 이 지구상에 존재하므로 세상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흰’을 읽고 있다. 소설이라기보다 짧은 수필의 연결 같기도 하고 자세히 읽다 보면 깊은 시 같기도 했다. 흰 것들에 대한 기억과 사유들을 덤덤히 적어 간 그의 글 속에서 인간의 진진한 삶의 고뇌와 덤으로 살고있는 아픔과 고마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속도보다는 방향의 진의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빨리 결론지으려는 조급함이 때론 방향감을 상실한 채 표류하기도 하기에 우리는 자연의 변화처럼 천천히, 바른 방향으로 그렇게 물들어 가야 한다. 글을 읽는 내내 차분하지만, 영감이 자유로운 그의 내면을 송두리째 접할 수 있었다. ‘흰’의 마지막 소제목 ‘모든 흰’의 내용은 이러했다.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선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최면 새벽 언덕 노벨 문학상 시인 화가

2024-11-0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홀로서기

홀로 피었다   바람에 흔들려 구겨진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도 예상 못 했지만 현실이었다   구겨진 얼굴 피기가 쉬웠겠는가   흔들리는 갈대가 하얗게 울음을 터뜨렸다   비바람 앞에, 천근의 무게를 지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설 때   정면으로 부딪칠 때 그때 비로소   홀로서기는 시작되었다   홀로 핀 당신만 보인다   쏟아 내지 않고 별빛 하나로 모이는   그곳에 서 있어 보면 알 수 있었다.   같은 생각, 같은 걸음을 옮길 때   외로움은 멀어졌다   결국 그 힘은 뿌리에 있는 것이다   당신 앞에 날마다 서는 그 힘은   홀로 견디는 그 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라. 홀로 핀 것들이 너만이더냐. 시름시름 꽃대를 세우더니 백일홍도 홀로 피었고, 씨 뿌리지 않은 과꽃도 여린 꽃망울 홀로 맺었고, 망초도 담장 구석에 기대 안개 같은 하얀 꽃으로 홀로 활짝 웃었다. 그뿐이더냐. 수백 광년을 지나 발밑 아래 홀로 부서지는 별빛은 그냥 서서 맞이하기엔 얼마나 눈물겨운가.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은 또 얼마나 포근하고 따사로워 온몸을 녹이지 않던가.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가 홀로 제 몸을 벗었고, 딱새도 홀로 밤낮으로 알을 품더니 올망졸망 제 식구를 데리고 춤추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세히 보면 모두가 홀로 견디는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어렴풋이 홀로 사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후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결국 어머니는 홀로 견디고 홀로 사셨다. 그리고 홀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초에 불을 댕기면 심지가 타면서 불꽃이 보인다. 심지가 곧게 깊이 박혀 있으면 불꽃은 오랫동안 그 빛을 잃지 않는다.     나무도 그 뿌리가 깊게 뻗어있지 못하면 비바람, 눈보라에 쓰러지게 된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제 몸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홀로 서려면 그 뿌리가 깊어야 한다. 홀로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그 심지에서, 그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해도 아무리 무성해도 홀로 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 있다.     나무가 눈을 뜨는 시간에 나도 눈을 떴다. 나무는 자신이 심어져 자란 곳을 불평하지 않는다. 오늘도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지를 휘며 살아감의 유연함을 보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깊은 땅을 향해 뻗어 가고 있겠지. 서 있다는 것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버티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랬다. 하루를 그냥 맞은 게 아니다.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두렵고 떨리는 하루를 그림자처럼 지내셨다. 노을마저 져버린 서쪽 창가에 어둠이 찾아오면 지친 어깨를 들썩이며 가슴을 저몄을 것이다. 잠든 네 자녀의 이마를 쓸어주며 기도 반, 눈물 반으로 지샜을 것이다. 나는 안다. 그 먹먹했을 하루하루의 시간을. 그 고통스런 날들을 견디며 고개 숙이지 않은 것들에겐 향기가 난다. 그래서 난 홀로인 것들이 좋다. 더 마음에 와닿는다. 홀로 견디어낸 시간이 자랑스럽다. 홀로여서 외롭다고 생각지 마라. 사람도 홀로 있을 때 가장 사랑스럽지 않더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비바람 눈보라 얼굴 피기 시인 화가

2024-08-1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당신은 내 집입니다

당신은 내 집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 지어진   당신은 내 집입니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아도 걷다 보면 머물러지는 곳 봄의 향기가 떠나지 않고 오월의 초록이 가득 담긴 당신은 내 집입니다 다시 불러봅니다 마지막 날처럼 안타깝고 경이로운 시간 당신은 여전히 내 집이어서 눈을 감으면 더 가까이   선명한 핏줄같이 만져지는 사랑스러운 내 집이어서 마음에 담기로 합니다 원뿔 같은 모난 세상 모난 뿔로 피어나기 싫어 몸 아래로 아래로 꽃 피우는 비밀의 정원, 나의 쿼렌시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해 주는 당신은 같은 곳, 같은 시선으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내 집입니다     한낮, 찌는듯한 더위에 몸을 잠시 피했다. 창가에서 바라보니 테크 주변에 나무가 만들어 놓은 두 평 남짓 그늘이 보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 데크로 나가 의자를 그늘 밑으로 옮겼다. 작은 테이블을 옮기고 나니 유리컵에 들꽃이라도 담아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수수꽃다리 탐스러운 꽃송이를 가졌는데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산들 내 앞으로 불어왔다. 더위는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늘 위에는 쉼과 새소리와 함께 수수꽃다리 향기가 온몸에 가득했다.     집이란 장소에 대해서 또 이 집에 살고 있는 자신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가? 늘 궁금했다. 집이란 의미가 그냥 사람이 거주 하는 생활 공간 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쩌면 집이란 의미는, 나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편안하게 지켜 주는 것 이외의 것들을 잊거나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아갈 때가 많았다. 당연히 그러려니. 맞아 그게 다야. 그 이외에 다른 건 없지. 더 바라면 욕심이지. 주변을 둘러봐도 다 그렇게 살고 있어. 잘 길든 애완견처럼 때로 사랑도 받고, treat도 받아먹으면서.      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바로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두 평 남짓 그늘 밑 같은, 그저 햇빛을 막아준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해지는, 따져보면 가진 것도 없는데 한없이 누리는 알 수 없는 포만감. 그런 사소한 관심과 작은 행복의 연유가 아닐까? 잘 꾸며놓은 집에 갇힐 수도 있겠다 생각되었다. 문득 집은 지친 나를 반가이 맞아 주는 곳. 상처받은 마음을 싸매고 치유해 주는 곳. 마음이 헛헛해 그리운 마음을 열면 꽃처럼 환하게 반겨 주는 곳. 마주 보고 있어도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정다움이 포말처럼 가득해지는 곳. 한없이 피로가 몰려와도 엄마 품 같이 포근하고 따뜻해 이내 잠들 수 있는 곳.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가슴 설레는 곳이어서. 상처와 아픔의 처진 어깨가 위로 받고 보듬어져 어느새 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어야 한다는, 다름 아닌 그늘 같은 퀘렌시아가 집이 되어야 한다는.   마치 투우장의 성난 소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 바로 그것이 진정한 집의 개념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루의 피곤이 사라져 버리고 새 날, 새 아침이 기적같이 펼쳐지는 곳이야말로 나의 집, 나의 쿼렌시아, 나의 천국이라 말할 수 있다.   늦은 오후, 나무 밑 두 평의 그늘. 넘어가는 햇살에 나의 쿼렌시아는 누워도 될 만큼 더 넓고 쾌적한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긴 하루가 그 축을 당기며 하루의 펼쳐진 휘장을 서서히 닫고 있다. 조용한 침묵을 깨고 오후의 끝자락을 잡아줄 심금의 첼로 선율이 들리는 늦은 오후. 그런 집을 찾습니다. 그런 당신은 나의 집입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수수꽃다리 향기 첼로 선율 시인 화가

2024-05-2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1   늘 놓아두었던 자리   그 물건이 없으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그 장소, 그 시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행복이 아닐까 싶다   다만 새벽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2 깊은 어둠으로부터 깨어나는 새벽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 새벽은 깨어나고 마른 가지에 살이 붇고 먼동은 새벽을 당겨 온다     동트기 전 새벽은 깊은 물 속과 같아서 물속 떠오는 비늘 같아서 가득한 물고기 집 같아서 새벽하늘에 빠져 깊이 잠기다 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잠기다 보면 어둠 속 보이지 않던 것들에게 찾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흔들 수 없는 어둠 속엔 단단한 껍질을 벗는 하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깨어난 생명이 내쉬는 숨 허리를 세운 직립의 나무   흔들 수 없는 어둠이 옷을 벗고 하늘의 밑동을 채우는 허락된 하루의 축복이 온다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담아야 할 일이 있기에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주워야 할 이삭이 있기에 나만을 위한 하루가 아니기에 기대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새벽 내 안에서 매일 눈을 뜨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3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 시를 쓰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제부터인가 멀어졌던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고 싶었다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듯 새벽 커피를 내리고 마음을 다잡을 때처럼 맨발로 꽃피는 뒤란을 걸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 가진 자의 행복이 부럽지 않다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 시간에 그 풍경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쓸 수 있을까? 물음 후엔 늘 치열한 삶에서 피하려는 비겁한 내가 보이기에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의미가 새롭다 처음 그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의 체온이 그립다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4 그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같은 하늘, 같은 계절을 보내었기에 시간 속에 녹아든 그만의 일상을 추정해 볼 때 그의 일상 안으로 나의 시간이 저물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단 해프닝만으로 그 자리를 채웠던 사람들 사이엔 먼 나라로부터 밀려왔다던 이방인의 숨 먼 곳으로부터 내게로 오는 별빛이 그렇고 쉼 없이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가 내게로 온 것이 그랬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곁에 내어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벽 커피 시인 화가 자의 행복

2024-03-1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친구의 강

1 : 70년의 강물이 흘렀다 / 70년의 해가 뜨고 / 70년의 밤이 지나갔다 / 어제도 걸었고 오늘도 걷고 있고, 내일도 걸어야 할 길 / 7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걸었던 길이 있었다 // 깃털이 비슷한 새가 모여 살 듯 / 멀리 시카고까지 날아와 같은 둥지를 틀었다 / “잘 지냈어?” “응 늘 그렇지 뭐” / 여전한 대답에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고 /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었다 / 돌짝 밭을 힘겹게 걸을 때도 있었고 / 양팔을 펼치고 하늘을 나는 듯 세상을 다 가질 때도 있었다 // “뭐 사는 게 별거 있냐? 근대 요즘 좀 힘이 빠진다” / 가을엔 가까운 곳에 몇 일 여행 가자던 친구 / Emergency로 실려간 그가 위암 4기란다 / 치료를 안 하면 한달, 안 받으면 1년이란다 / 날은 어두워지고 머리 속은 온통 까만 카오스 // 70년의 강물이 흐르고 / 70년의 해가 뜨고 / 70년의 밤이 지나가는데 / 친구야, 병상의 하루를 잘라 나누어 살자 / 먼저이고 나중인 듯 함께 기대어 걷자 / 시카고 가을 들녘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 널 위해 걸음 걸음 환한 꽃등 밝혀 놓으마     2: 단풍이 아름다운 숲길을 친구와 걷고 있다 / 바람이 불고 낙엽이 구른다 / 저 산도 옷을 벗는다 / 그저 풍경 일 뿐이다 / 나의 풍경은 사람 이었으면 한다 / 그 마음 이었으면 한다 / 알 것 같은 마음이 내 안에 담겨지는 /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 되고 / 지는 노을에 눈시울 붉힐 줄 아는 / 별빛처럼 오랜 기다림의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은 / 한 사람 이었으면 좋겠다 / 한 방울의 피도, 살도 섞이지 않아도 / 내가 너 이고 / 네가 나 이듯 / 절절한 풍경이고 싶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불행합니까? 곳곳에 피어나는 들꽃. 부드러운 들판의 축제가 가슴에 사무치게 아름답습니다. 마침표를 찍은 풍경이 아니라 지어져가는 풍경입니다. 내내 곱게 내려 앉는 사랑입니다. 이어져가는 생명입니다. 꽃처럼 환한 미소입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유입니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길을 걸으며 저 마다 허락된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결국 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지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나무의 모양만으로는 나무를 알 길이 없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압니다. 열매가 나무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나무의 결국은 열매입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삶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사람의 무기는 근본이 되어질 때 비로소 힘이 납니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깊은 평안 속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상이 사라진다 하여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꿀어 나머지 시간들을 가꾸기를 바랍니다. 친구의 강은 오늘 아침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흐른 만큼 짧아지기는 했어도 의연하게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은 먼동처럼 황홀하고 노을처럼 아름답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B에게 〉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친구 시카고 가을 걸음 걸음 시인 화가

2023-10-3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10년 뒤가 궁금해졌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때쯤 내 모습이 궁금해졌지요. 아직은 쓸만한데 10년 뒤엔 볼 품 없겠죠? 배도 나오고 이마엔 주름이 깊게 파였을 게고 허리도 굽고 걸음도 느릿해지겠죠? 지금도 책읽기가 불편한데 눈도 시원찮아져 책과 담을 싸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친구들은 또 어찌 되었을까요. 몇몇은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다른 몇몇은 병마와 투병 중에 있을 수도 있구요. 누구는 집을 정리하고 노인 아파트로 갔고 누구는 따뜻한 곳을 찿아 저 남쪽 Florida로 이사 갈 수도 있겠죠. 좋은 친구와 헤어지기도 하고 멀리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기도 하겠죠.앞으로도 쭈욱 오늘같이 살리란 보장은 없지요. 갑자기 서글퍼 지네요. 살다 보니 사람들을 믿다가 큰 코 다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그렇다고 나는 믿을 수 있냐는 물음엔 노에요. 나도 믿고 너도 믿었는데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하더라구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주 작은 차이로 멀어지더라구요. 말투가 달라지고 행동이 어색해진 너에게 서운해져 괜히 나에게 화를 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게 화를 내는 건 아주 잘 하는 거에요. 상황을 자세히 보면 내게 화낼 수도 있어요. 내게 물어봐야 했어요. 무엇 때문이었냐는 화살은 내게 향했어야 했어요. 이전도 그랬거니와 앞으로의 삶도 서로에게 진실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어요. 진실이어야 해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한다든지, 내키지 않은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은 거짓이지요. 관계는 서로에게 진실일 때 지속되겠지요. 행여 이 편지를 10년 뒤 읽으신다면 그때 그 마음이 진실이었다고 말해준다면 참 좋겠네요.   오래 정말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급기야 뒤란을 걸으며 달빛에 취하기도 했어요. 어슴푸레 깨어나는 하루를 맞으며 나를 달래야 했어요. 우리 이제 그만해요. 누가 내 마음을 알겠어요. 이게 뭐지? 더 알려고 하지 않으려 해요. 다만 달빛 내리는 뒤란에서 나의 모습, 또 너의 모습을 찿을 거예요.     높고 외롭게 살아요       가을잎처럼 우리 물들어 가는 건 어때요 //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 그냥 꼭 안아줘도 괜찮겠지요 / 고마웠고, 미안했고, 오래 잊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요 /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늘을 나는 샤갈의 우체부 기분이었다구요 / 난 알아요 / 지금 내 일을 꾀나 잘 계획하고 분주히 해나가는 나를 보면 /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 한편으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부인할 수 없어요 /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 서로에게 잊혀지기도 하겠죠 / 젊은날 아픔이 사라진 것 같이 / 강물 흐르듯 떠밀려 멀어지기도 하겠죠 // 아무튼 좋아요 / 우리 이렇게 살면 어때요 / 꽃이 피면 봄이 왔다고 너무 소란 피우지 말고 / 비가 오면 젖는다고 피하지 말고 촉촉히 젖으며 살아요 / 한더위에 숨을 고르며 살다 / 노을처럼 붉어지는 가을잎처럼 물들어 함께 익어가기로 해요 / 하얀 눈밭에 눈사람처럼 얼어도 / 더운 숨 내쉬며 서로에게 뜨거운 사람이 되어 살아요 / 등불이 되어 어둔 밤 비춰 주며 / 어깨에 쌓인 눈 털어 주며 / 솔처럼 높고 외롭게 살아요 /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며 / 이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하며 살아요 // 너의 소리를 나만 들을 수 있고 / 나의 소리를 너만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 허락한 시간 만큼 숨죽이고 살아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남쪽 florida 노인 아파트 시인 화가

2023-09-1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별을 세고 난 뒤에

한밤 중 전화를 받았다. 의식도 없이 계단을 내려와 덱크로 향한 문을 열었다. 밤 하늘 수놓은 별을 올려 보다 그만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왜 우냐고 물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파란 하늘에 붉은 볼을 두 손에 묻고 덱크의 끝 계단에 주저 앉았다. 여전히 밤이었지만 푸른 불빛이 내 안에 반딧불처럼 떠 다니고 있었다. 칠흙 같은 어둠이었지만 빛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수선화 가득한 봄날은 가고 / 햇볕 따가운 날들도 지나고 / 당신 미소 같은 가을이 올 것임에 틀림 없다 / 손을 펼쳐 눈을 받고 /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언덕을 오르고 있을 두 다리 / 14시간 앞선 걸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기에 / 그 이름 눈 속에 묻기로 한다 // 밟혀도 밟혀도 봄처럼 살아날 이름이여 / 이곳보다 무성한 잎들이 자라고 / 아픈 바람이 불고 / 가로수 길엔 안타까움이 물들고 있는데 / 줄 지은 그리움에 기대어 / 기쁜 눈물을 흘리면 어떠랴     살아있는 사람은 이별하지 않는다. 잠시 자기 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다만 계절의 온도와 색깔이 내게 다가와 절규가 될 때 다른 시간이었던 날들은 견뎌야 했다. 함께 바라보지 못한 것들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뿐 스치는 다른 풍경이 겹쳐올 때 시간의 강물은 거슬러 오를 것이다. 장편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처럼 남겼던 말이 기억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삶의 근간이 된 흙으로 남겨질 때 인생에 대한 물음에 푸르를 수 있다면, 그때 그때 벗어놓은 옷 같은 시간이 내 삶이고 내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기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슬퍼지기도 하는 역설의 문장이 아닌가.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의 뜻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이 말은 성경 요한복음 십 삼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로마로-”라는 짧은 대답을 하신다. 네가 두려워 도망 가고 있는 바로 그곳 로마로 간다는 뜻이다. 그 후 베드로는 빠져 나온 로마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남은 삶을 불태운다. 마침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을 당한다. 무엇이 그에게 이처럼 담대한 용기를 주었을까? 버려도 좋을 것들을 위하여 살던 나에게서 꼭 지키고 가져야 할 것들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을 내어 놓고 죽음을 맞이 한다. 로마로 가는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다. 넓고 편안한 길을 버리고 좁고 험난한 길을 택한 베드로의 길을 통해 오늘 나의 발걸음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진다. 꽃이 피고 죽어야 열매가 자라고, 윗 잎이 자신의 위치를 내려 놓을 때 새 잎이 그 위로 자란다.     이런 역설의 삶에서 기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나의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니고, 너의 삶이 너만의 삶이 아니기에, 서로에게 별이 되는 그런 삶은 향기를 풍기게 된다.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이 향기는 멀리 퍼져 나간다. 시간과 환경을 뛰어넘어 향기 나는 삶이 되어진다는 것은 죽음도 막을 수 없다. 죽음을 맞이한 그 곳에 설명하기 힘든 기쁨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산 위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만이 산 아래에서 변화된 삶을 증거할 증인이 될 수 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로마로-” 베드로와 주님의 짧은 대화가 마음을 두드리는 밤이 오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곳 로마 성경 요한복음 시인 화가

2023-08-2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별난 공식

별난 공식   나 만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 / 수 천, 수 만의 소문으론 설명될 수 없지 // 꽃의 색이었던가 / 잎의 색이었다가 / 하늘의 색, 바다의 색은 기억날 듯 한데 /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색들은 / 오랜 시간을 인내한 후 가지게 된다는 / 은근히 풍기게 된다는 // 바라보는 시각을 뒤집어 보면 / 내 색이 아닌 당신 색으로 보여진다는 / 아픔이 반쪽만 보이기 시작한다는 // 시간을 먼 발치 별빛에 묶어두면 /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 슬픔에도 없는 공식이 존재한다는 //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건 실례가 아니랍니다 // 색보다 향기는 오래 남아 / 그 향기는 봄마다 넓고 낮게 퍼져 가고 / 꽃은 바람에 흔들려 색은 떨어지지만 / 향기는 남겨져 색으로 그려진다는// 얼굴이 달아 올랐지 // 슬픔에도 없는 침묵 이라는 / 개나리 꽃가지 바람에 춤추는데 / 이렇게 낯선 하늘이라니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건 실례가 아니랍니다. 나의 감정을 참다 보면 마음의 병을 가지게 되니까요. 이번 주는 무척 바빴답니다. 내 일에 집중할 수 없을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돌아서면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했답니다. 살다 보면 만남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성장하고 커가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좋을법한 경우도 종종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제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향기로 혹은 색깔로 남겨지는 것 같습니다. 한 순간을 만났든 오랜 세월을 살아왔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고 자기만이 풍기는 향기가 있답니다. 짧은 시간 만나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답니다. 내가 꼭 필요한 시간에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내 곁에서 분신처럼 날 돕는 사람도 있답니다. 내가 좋은 날엔 내 곁에 있었는데 내가 힘들고 아플 때엔 나를 떠난 사람도 있답니다.     사람의 관계란 우연히 만나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멀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의 관심에 공감하면서 깊어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서로의 관계가 인연이 되고 필연이 되면 다행이지만 서로에게 아픔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된다면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얼굴이 먼저 떠오르면 보고 싶은 사람이고 이름이 먼저 떠오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지만, 그리움은 그 사람이 아니면 채울 수가 없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가운 소식에 하루가 빛났습니다. 이렇게 만나 뵐 수 있는 거군요. 오래 전 젊은 날 캠퍼스에서 만나 끓는 피를 나누었던 한 사람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공항엔 못나가지만 그날 저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경주에서의 만남과 서울역에서의 고마운 모습은 나의 남은 날 내내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책 출간을 앞두고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한 친구는 단 열흘밖에 만나지 못한 그야말로 막 알게 된 도반이지만 깊은 속내를 뒤집어 말해도 웃으며 받아주는 오래된 연인 같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한 친구는 출판기념회 장소로 고민하는 나에게 선뜻 이곳에서 하라며 시간과 장소를 비워놓겠다는 눈물 핑 도는 말을 보내왔습니다. 한 친구는 하모니카를 불어주겠다고, 몇 몇 시인들은 축사를, 대학동기는 사회를 자청하고 나섰답니다. 누우면 가슴이 저며오는 이름들이, 얼굴들이 있습니다. 오늘 밤하늘엔 유난히 고운 별들이 빛을 발합니다. 반평생을 살아도 낯설은 시카고의 봄은 언제나 오려나요. 비 같은 눈이 주룩주룩 내리는데….(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공식 오늘 밤하늘 시인 화가 개나리 꽃가지

2023-03-2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함의(含意)에 대하여

바람이 분다 / 바람은 모든 사물을 흔들어댄다 / 흔들리다 마구 흔들리다 / 튀어 나온 단어 하나 / 멈추지 않는 흔들림 속에 흔들리고 있다 / 내가 슬프면 너도 슬퍼야 하고 / 네가 기쁘면 나도 기뻐야 한다는 논리는 허망하다 / 속에 감춘 속내는 드러나지 않는다 / 다만 소용돌이 속에 존재하다 사라지는 별이 될 뿐 /  내가 너였다가 그대로 네가 되어지는 빙의 /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다 내 앞에 서 있는 너를 마주한다 / 아이는 아이의 말을 하고, 어른은 아이의 말을 잊어버린다 / 합의 되지 않은 목적지에 내가 먼저 가고 있다 / 나는 확실한 전제를 학습했기에 함의(含意)에 도달하기 전 / 온 몸에 따라붙는 분진의 오염을 자를 수 있다 / “안국역에서 내리실 분은 우측 도어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 역은 시카고입니다” / 바퀴가 소음을 내며 기차가 섰다 /  떨어진 수천의 별들이 가슴을 파고든다 / 내려야 하는데 내 발은 시카고에 있다       톱니같이 물려 돌아가는 세상에서 왜 톱니가 되지 못했을까? 스스로 이탈하고 싶어서였을까? 옥죄이는 숨을 트기 위해선, 나됨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타고 있는 자전거의 페달을 멈추어야 했다. 넘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한 얼굴이 떠 올랐다. 긴 팔을 가진 늘 배가 고팠던 사람. 그의 앞에 놓여진 음식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는 늘 배가 고팠다. 유독 그의 눈이 반짝일 때는 책장을 넘길 때였고, 노을이 지는 언덕에서 하루를 마감 할 때였다. 기대하지 못한 꽃이 필 때였고, 누군가를 저리도록 사랑할 때였다. 속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로 돌아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나를 지으신 당신 앞에 섰을 때 나에게 허락한 한 달란트를 빼앗기고 슬피 울지 않도록.   담장을 헐고 너른 땅에 꽃을 심었다는 장소는 인사동 길 건너 북촌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다. 담장 안은 더 이상 궁금해 지지 않았고 심겨진 꽃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 왔다. 허물어진 담장 옆에는 나즈막히 ‘열린송현’이란 사인이 눈길을 끌었다. 담 안에 것들을 알지 못하던 날들이 지나고 이제는 눈과 눈으로 선명하게 담 안의 것들을 만나는 날.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를 여는 힘이고 시간을 끌고 가는 동력이 된다.   인왕산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북촌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곳으로 막연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한참을 비탈을 올랐다. 미지의 세계로 발길을 옮기는 자유는 이런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런 그리움의 시간들이 쌓이고 발효되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닫혀있는 문들을 열고 들어가노라면 풍경은 내가 되고 어느새 나는 풍경이 된다. 10시에 오픈 한다는 갤러리의 문이 아직 닫혀있다. 30분을 갤러리 앞 벤치에서 멀리 보이는 북촌의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 처음 온 이곳이 오래 알고 있었던 기억 속 장소 같은 친숙함에 섬찟 놀라고 있다. ‘기다리다 갑니다’ 메모를 보내고 떠나려는데 ‘5분이면 도착합니다. 조그만 기다려 주세요’ 숨이 찬 작가의 모습이 내 앞에 섰다. 처음 보지만 페북을 통해 오랜 대화를 나눈 탓인지 반가움에 서로의 등을 안아주었다. ‘Blue Note’ 파리에 살고 있는 사진작가 Cho Mi Jin. 건네준 커피를 마시며 작품에 대해 설명도 듣고 파리와 시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물로 받은 사진을 안고 북촌을 내려오면서 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에 머물러 있고 발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진리. 닫힌 문들을 열지 않으면 결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닫혀진 세상을 대하는 삶의 태도 역시 이와 같아야 된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잡음이다. 나의 한계 속으로 기울어 가는, 어느 시점부터 정지되어버린 삶을 되돌리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대낮 하늘엔 엇갈리며 내리는 가는 눈발이 춤추며 서로를 부딪히며 내리고 있었다. 날 데리러 오신다던 엄마를 그리워하다 잠에서 깨어 멀어져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엄마를 찿았던 기억이 난다.     훗날 그 그리움으로 편지를 쓰고, 봄날 개나리를 만나고, 깊은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린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은 그리움이란 한 단어로 연결되어졌다. ‘내가 시를 만든 것이 아니고 시가 나를 만든 것’이라는 괴테의 말에 공감한다. 시인이 숨겨놓은 서성거리는 정서는 우리와 상관 없었던 문으로 이어져 ‘끝내 시가 나를 이겨주기를’ 바란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시카고 이야기 건너 북촌 시인 화가

2022-11-2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손을 잡는다는 것은

비 오는 호숫가를 걷다 호수에 빗방울이 만드는 무수한 동그라미를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동그라미는 점점 퍼져 서로 겹치고, 만나고, 서로의 손을 잡고 또 잡고, 호수는 온통 동그라미의 축제였다. 하늘이 열리고 호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늘의 구름을 제 몸 가득히 담아 내다가 흥겨운 하늘이 내린 비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한폭의 움직이는 추상화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는 이곳에 행복한 일들이 마구 생겨나는 것이다. 세상에 덜렁 나 혼자라면 살아감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빗방울이 멈추고 호수는 다시 노을을 그리고 있다. 붉어지다가 푸른 보라를 찍은 큰 붓을 호수 깊은 곳에 뿌리며 노을을 담아내고 있다. 고요가 내려앉은 한 밤엔 번쩍이는 별빛을 사랑하고, 아침이슬을 머금은 새벽엔 안개처럼 깨어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적게 생각하고 너무 많이 계산한다. 어떤 경우에는 생각도 없이 주판알만 튕길 때가 적지 않다. 당신의 필요에 나의 사랑을, 때론 나의 필요에 당신의 관심과 배려가 손 잡아질 때 오병이어의 기적은 꽃피우게 된다. 서로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산다? 이 땅에 태어나 유년의 시기를 거쳐 오랜 기간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던가. 만일 그 어려웠던 시기에 당신의 따뜻한 손잡음이 없었더라면,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을 때 그대의 편안한 어깨동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손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잘 자라준 뒤란의 데이지가 종일 내린 비바람에 고개를 숙였다. 세워주려고 노력해 봤지만 불가능이었다. 포기하고 뒤 돌아서는 마음은 참 불편했었다. 다음 날 아침 허리를 곧게 핀 꽃대를 바라보다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손이 그곳에 있었다. (시인, 화가)     손을 잡는다는 것은 / 신호철     하늘 열리고 호수 가득 / 투득 투득 빗방울 떨어진다 / 작고 큰 동그라미 서로에게 / 단단히 손 잡으라 한다 / 이내 호수는 하늘이 되고 / 하늘은 호수가 된다 // 세상에 덜렁 나 혼자라면 / 살아감의 의미가 무엇일까? / 손을 잡는다는 것은 / 서로의 마음을 읽는 것이어서 /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것이다 / 지나 왔던 모든 순간이, 힘들었던 모든 일들이 / 이마에 땀을 훔치며 허리를 펴는 것이다 / 어둠을 지나 환한 미소를 피우는 것이다 / 지난 밤 비바람에 쓰러진 꽃대를 일으키시는 / 당신의 손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 / 흔들리지도 마 /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지 / 너와 나 잡은 손 위에 / 당신의 손이 포개질 때 까지 / 손을 잡는다는 것은 / 미움이 사랑이 되는 것이다 / 서로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 호수와 하늘이 하나 되듯 / 너와 내가 하나 되듯 / 함께 걷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 내가 너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 하나의 아픔이 두개의 행복으로 /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밝은 세상으로 / 꿈꿀 수 없었던 미래가 현실로 / 오병이어의 기적이 / 너와 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손 /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삼겹줄이 되는 것이다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동그라미 서로 투득 투득 시인 화가

2022-07-1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다

우리가 기울일 노력이란 / 깨어서 지켜보는 일 뿐 / 물이 흐르는 일처럼 / 바람이 지나는 일처럼 / 사람의 일도 그렇게 // 나에게 있어 너에게 없는 것이라면 / 나에게 있어 모두가 좋은 게 아니게 된다 / 밥을 먹다가 / 이 밥이 어디에서 왔는지 / 이 밥을 먹지 못하는 이가 / 어딘가에 있지는 않은지 / 한 숟갈 한 숟갈 밥으로 생각을 잇다 보면 / 밥을 많이 갖는 일이 / 나에게 있어 좋은 것만은 아니게 된다 / 좋은 옷을 입다가 / 이 옷이 어디에서 왔는지 / 허름한 옷을 입은 이에겐 /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 한 올 한 올 옷으로 생각을 잇다 보면 / 좋은 옷을 입는 일도 / 나에게 있어 좋은 것만은 아니게 된다 / 나의 열심이 / 너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 나의 꿈과 성취가 / 너에게 상실이 될 수 있음을 / 나에게 있어 모두가 좋은 건 아니게 된다 //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모두가 좋은 건 무엇일까? / 윤동주 시인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한 줄의 시를 가슴에 품다가 / 시인의 마음이 나에게 화두가 되었다 / 하늘에 대어 보고 / 나무에 비춰 보고 / 하늘을 보고 있으면 / 가슴은 자꾸만 비워지고 / 나무를 보고 있으면 / 나무 아래에 앉은 창조주가 보이고 / 그렇게 나는 점점점 / 감자를 먹으면 맛있어서 / 마음은 포실한 감자밭 같고 / 보푸라기가 튼 옷을 입어도 / 얼굴엔 그늘 없이 웃을 수 있는 / 나에게 있어 모두가 좋은 그런 게 무엇일까? / 오늘도 나는 궁금하여서 /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신동숙의 글밭 450회 글)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 대화를 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소. 페북에 올라오는 당신의 글을 읽다가 그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 시인의 정갈한 마음 같기도 하고, 농부의 소박한 하루를 만나는 듯했소. 나를 돌아 보아 잠시 고개를 들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소. 오늘은 새벽이 채 오기 전에 밖에 나가 아직도 반짝일 하늘의 별들을 세어야겠오. 밝아올 새날엔 가슴 가득 별들을 껴안을 거요. 무엇을 달라, 무엇이 부족하다 말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싶소. 가능한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겠지만 혹여 만나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겠소. 내 인생의 길 위 하늘에서 보내준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겠소. 밤이 조용히 지나치고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소. 이제 일어나야겠오. 아직도 이곳은 아침 저녁 날씨가 차오. 당신을 향해 걷고 있소. 어두운 새벽은 나를 마중 나오고, 난 푸른 새벽을 맞으며 동쪽하늘이 붉어질 거짓 없는 하루를 기다리고 있소. 깊고 어두운 블루가 조금씩 벗겨지며 먼동이 트고, 나는 선채로 긴 호흡으로 당신을 만나고 있소.     가슴 가득 껴안으신 / 하늘과 별을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무엇을 달라하는 / 내 안의 욕망을 멈추어 / 단지 깨어서 / 바라보고 있으면 / 나보다 더 나를 아시는 이가 / 나를 통해 하시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 단지 내가 기울일 노력이란 / 평화의 숨을 고르며 / 단지 깨어서 지켜보는 일 뿐 / 물이 흐르는 일처럼 / 바람이 지나는 일처럼 / 사람의 일도 저절로…. (S의 답글)     밥을 먹다가도, 옷을 입다가도, 감사하지 못하는 나는 사람도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다. 앞에서 뒤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앞으로 지나갈 때도 있다. 그 때는 가던 길을 잠시 서서 내게 물어볼 일이다. 머리를 들어 밤하늘 반짝이는 별들을 세어 볼 일이다. 밝아오는 먼동을 놓치지 말고 내 안에 담는 일이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한 술 밥으로, 보푸라기 옷으로도 행복해야 할 사유를 물어야 한다. 말라버린 깊은 눈물샘을 흔들어 갈라진 내면을 보듬어야 한다. 세상은 거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그대로 온다. 알지 못하는 세상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나에게 있어 좋은 것이 너에게 없어 어려워진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다. 당신 내면의 생각을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제 가슴에 심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윤동주 시인 나무 아래 시인 화가

2022-05-0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노란 나비 날립니다

너무 멀리 있어 함께 슬퍼하지 못했습니다   노란 리본도 매어주지 못했고   오열하는 부모님의 손도 잡아드리지 못했습니다 온 바다가 하루 종일 철썩철썩 소리 내 웁니다 빈 책상 위 놓인 꽃마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립니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동안 내내 움직이지 말라던…… 그 말을 믿었지만 이젠 코 밑까지 차오르는 거친 호흡 마지막 숨과 함께 짠 바닷물을 삼키는 그대들의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아 온종일 서성이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지금도 그대들의 슬픈 얼굴을 지을 수 없어 마음에 큰 빚으로 떠 다니는 파도의 하얀 기억   곡선으로 휘어져 오는 자그마한 외침이 멀어지기 전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위로 노란 나비 날립니다     노란 나비 날립니다     네가 어디로 가는지 난 알지 못한다 힘겹게 산을 넘는 걸 보았고 들꽃 위 긴 여행을 쉬어 가는 걸 보았을 뿐 너의 집이 어딘지 난 알지 못한다 바람에 밀려 날개가 접칠 때 세월의 바닥으로 몸을 피하는 너를 보며 마음을 조렸을 뿐 손을 내밀지 못한다     바다가 보이는 팽목항 바람 심하고 파도 높은 날 멀리 아주 멀리서 너를 보았다 가냘픈 두 날개 힘겨웁게 저으며   바다를 날고 있는 너를 보았다 심한 열병으로 온종일 누워 있어도 일렁이는 슬픔의 높이만큼 파도가 높다     오늘도 심한 바람에 견딜만큼 흔들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오늘도 단단해진다 어디로부터 찬 바람이 불어 왔는지 봄 바다는 춥고 다시 얼었다 견디고 견딘 것, 아프고 아픈 마음 찢기어 부서지는 파도 노래를 멈추고, 음표를 지우고   부르고 또 부르다 목이 멘 이름들 마다 봄과 겨울 사이 먹먹한 바다 위 나르는 304마리 노란 나비의 못다한 꿈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 차오르는 숨을 짠물에 토해내며 머리를 저어도 한없이 가슴을 쳐 검붉게 멍드는 파도가 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비 미시간 호수위로 시인 화가 기억 곡선

2022-05-0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바람의 하루

같은 눈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고 불투명하게 비쳐질지라도 믿어주고 힘을 실어주는 것. 갈등과 반목의 마음을 다잡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김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목표도 다르기에 같음이란 단어는 걸맞지 않게 들릴지도 모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자, 무엇이 다른가?     급히 대답하는 자가 잘못을 저지를 확률이 높다.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급한 말은 실수를 낳는다. 말이 씨가 된다. 행여 그 씨가 자라면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이때 씨의 의미는 긍정과 부정 모두 적용되지만 부정적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말이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로 인하여 심한 갈등을 경험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질 말고 말이 아니면 탓하지 마라’는 속담을 기억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도 있다. 수 없이 갈등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모두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말 말 말만 무성했다. 그리고 우리는 달랐다. 서로의 등을 지고 사랑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이었다. 길이 아닌 곳은 걷지 말하더니 우린 용감하게 비탈을 걸었다. 다름이 없는 건 봄이다. 어김 없는 것은 바람이다. 제 갈 길도 있고 내 갈 길도 있지만 난 바람의 길을 찬미한다. 말과 행동의 괴리가 없는, 겉과 속이 꽉 찬 봄을 밀고 오는 너. 바람은 사랑을 품은 진정한 고수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나를 민다 뒤돌아본다 바람의 손 발은 없다 바람이 구른다 동그랗게 어깨를 누른다   바람이 운다 소리내 우는 바람 바람의 성대가 떨린다 바람을 안을 수 없다 들꽃을 부둥켜 안고 바람은 오래도록 운다   해는 지는데 바람의 집은 멀다 부딪혀 오고 빠르게 간다 쉼 없는 자유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 바람의 생이다 지금 여기 바람의 하루가 간다     오랜만에 데크에 앉아 뒷뜰을 바라보았다. 삼월의 중순에 한차례 눈이 내렸고 쌀쌀한 겨울 바람이 몰아친 후, 홀연히 따뜻한 봄날이 왔다. 4월에도 눈이 오고 이른 아침 서리가 내리는 시카고의 변덕스런 날씨. 진정한 봄을 맞으려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난 후 지칠 무렵 비로서 봄은 한발 한발 내게로 다가오곤 했다. 오늘같이 하늘하늘 바람이 불고 나도 모르게 스웨터를 걷어올리게 되는 날이 찿아 오면 봄을 마냥 즐긴다. 바람이 얼굴을 간지르며 벌써 저만치 달아난다. 뒤따라오는 오는 바람은 내 머리칼을 들어 올리고 같은 방향으로 줄행랑을 친다. 쉼이 없는 무한의 자유. “너 잠은 자고 다니니?”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또 바람이 불어 온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겨울 바람 시인 화가 부정 모두

2022-03-1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빈 들은 빈 들이 아닙니다

빈 들이라 하지만 빈 곳은 없습니다 /  한 평 땅 속에 셀 수 없는  씨앗이 잠자고 있으니까요 / 그 곳을 걸을 때 마다 발바닥이 간지러워요 / 오래 걸을 수 없지만 발 끝을 세워 걸어야만 해요 / 한 톨의 씨앗도 깨울 순 없으니까요 / 봄에 깨어나기 위해 잠은 충분히 자야겠지요 / 내 마음 빈 들에도 셀 수 없는 단어들이 잠들었어요 /  잘못된 줄 알고 있지만 늘 흔들고 있어요 / 내가 그를 깨울 때는 그는 깊이 잠 들었고 / 그가 나를 깨울 땐 내가 세상에 나가 너무 멀리 있었어요 / 시간이 되고 봄이 오면 만날 수 있다는데 / 한 평 내 빈 들에도 봄은 오겠죠, 꽃도 피겠죠 / 사실 그와 내가 만날 특별한 시간과 장소는 없어요 / 걷고 있는 이 길 위, 만나게 될 모든 시간이죠 / 밤이라도, 이른 새벽이라도 꿈틀거려만 주세요 / 난 알아요 깨어날 수 없는 씨앗의 고뇌를 / 그래도 흔들어 깨우는 나를 나무라진 마세요 / 삶의 여러 갈래 길에서 만날 당신을 하늘만큼 사랑하니까요 / 그리하여 봄을 기다리는, 빛나는 초록을 꿈 꾸는 빈 들은 /  빈 들이 아니랍니다 나와 네가 만나 피어 낼 / 꽃 한송이, 시 한편 품고 잠들은 빈들은 /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어머니 가슴입니다     눈이 내린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간다. 높은 측백나무 위에도, 낮은 향나무 위에도 마른 풀잎 위에도, 거리에도, 빈 들에도 눈이 내린다. 하늘 가득히, 바라보는 내 눈 앞에 하얀 쌀가루처럼 눈이 내린다. 눈을 감는다. 손에 잡히듯 다가오는 비탈길, 그 비탈길에도 눈이 쌓인다. 그때를 기억하면 눈물이 난다. 그러나 한편 그 때만큼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다.     미끄러지는 눈길 위에서 연탄 50장을 싣고, 밀고 당기면서 비탈을 올랐다. 언덕 길 화실, 썰렁한 난로에 연탄불을 지핀다.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 음률이 하늘을 타고 내려온다. 내게는 오랫동안 꿈틀거렸던 시간이었다. 잠들지 못하고 빈 들에서 발을 구르며 봄을 기다렸던 젊은 날이었다. 여전히 내 것을 움켜 잡은 채로 말이다. 소유와 무소유, 존재와 사라짐의 긴 여운을 남긴 밤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서로의 존재를 바꿔가며 인생의 긴 길을 걷고 있다. 행복과 불행, 옳고 그름의 잣대도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어제의 가난과 불행이 오늘의 부와 행복을 가져 오게 된 동기가 된다면, 무 존재의 정의도 이미 존재라는 명제 속에서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정원을 가꾸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잡초를 뽑아주고,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구역을 정리하고, 흙을 고르는 일이다. 이 일은 씨를 뿌리고, 꽃을 심고, 적은 묘목을 가꾸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보이는 정원만 그렇겠는가? 마음 속에 자라는 잡초,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 안을 채울 새로운 용기와 꿈은 꽃으로 피어날 수 없으니까.   빈 들에서 수 없는 생명을 본다. 보이는 것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고, 들리지 않지만 들을 수 없을 뿐 소리의 파장은 공기 속에 가득하다. 빈 들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봄이 오듯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꽃 한송이 피워낼 마음밭의 경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눈 내리는 저녁, 빈 들에 서서 하얗게 변해가는 나도 빈 들의 한 풍경으로 점점 작아져 가고 있다. 빈들의 봄을 함께 꿈꾸며….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무소유 존재 시인 화가 연탄 50장

2022-01-3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로 살아가는 이유

나로 살아가는 이유       슬퍼하지 않으려면   안으로 안으로 삼켜야 합니다 그래도 슬픔이 머무르면   내가 지은 높은 벽   윗부분부터 허물어야 합니다   허물다 보면 벽 너머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낮아진 벽 너머로 흔들리는 나무가지가 보이고 바람이 불어 옵니다   하루가 지나는 소리 나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아프지 않으려면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난이도를 통과 해야합니다 보려면 눈을 떠야하는데   눈감고 귀로 보아야 합니다 소리내지 않는 꽃, 나무 눈 감고 귀를 엽니다 꽃이 먼저 말을 걸어오고 나무가 중얼거리기도 하는   다른 세상이 들립니다 하루가 지나는 소리 나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오늘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거지?’ 엉뚱한 질문을 내게 던진다. ‘그냥 열심히 살면 되지, 무슨 질문이 그래.’라고 반문할 지 모르지만 내가 향하고, 생각하고 있는 오늘이 결국 바로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에 이 질문을 피해가서는 안 된다. 목표를 정하고 그 길을 걷다 보면 그 길의 끝에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나를 살피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행여라도 나를 잃어버리고 그저 하루 하루 급한 일에 쫓기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나를 찾아 나다운 삶을 살아감은 인생을 살아가며 가져야 할 중요한 관문이 아닐까 한다. 그 일은 빠를수록 좋고 깊고 단단 할수록 견고한 삶을 이룰 수 있어 좋을 것이다. 등산을 앞두고 어느 봉우리를 향해 오를 것인가를 생각지 않고 산을 오른다면 그 등반은 내내 지루하고 힘든 산행이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의 길도 그렇지 아니 하겠는가. 사노라면 의도치 않게 곤경에 빠질 때가 있다. 그 불편하고 불안전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나를 사랑하고 나답게 살 수 있는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어떨 때는 나의 삶이 타인의 말과 행동, 의도에 따라 흔들릴 때가 있다. 그때 나를 다잡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요. 그저 덮어두고 지나갈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겸손은 때로 목표를 향해가는 여정에 방해 요소가 될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가 겸손이라고 한다. 또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인정해주는 것이 삶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다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도가 지나친 겸손은 자존감을 낮추고 무기력한 삶의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No라고 대답한다고 건방지거나 무례한 사람이 아니다.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거절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가치와 인격을 드러낼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의로 받아놓고 힘들어 한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배려하지 못한 미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은 나 자신을 버리는 일은 진정한 나를 회복하고 나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유아독존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우리가 종종 잊고 살았던 인생의 목표를 다시 바라보며 나를 지으신 이의 목적대로 그 길을 평안함 속에 자존감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을 수 있는 다른 세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은 후로는….(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행동 의도 우리 인생 시인 화가

2021-12-2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가을을 향하여

가을을 향하여         아프다 가을의 길목에는 아프다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은 지나고 울고 서 있는 나무, 다가설 수 없는 갈대숲, 가벼워지는 가지들이여 우리는 모른다 잎새 떨군 가지마다   붉게 맺힌 열매를   아프다 가을의 길목에는 늘 아프다 제 목을 꺾는 꽃들이며 비에 젖어 바람에 떨던   숲의 울음을 기억하라 깎이고 패인 생멸의 시간 차라리 아름답다 말하고 싶다 들리는가 중후한 저음의 저 들판의 소리가     아프다 가을의 길목에는 늘 아프다   붉어지는 먼동에 피어나는 하루 어둠 속 살아나는 숨 소리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불어오고   갈대가 눕는 언덕 위로 어둠을 갈아입는 저 산들 겸허한 순종의 무릎들 무거웠던 겉옷을 벗어 버리고 붉게 토하는 서러움 담아   그리웠다고 말하자 보고 싶다고 말하자 붉게 토하는 가을을 향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입니다.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집을 나섭니다. 몇번이나 나에게 다짐했던 약속이었습니다. 막 동이 틀 무렵 길 건너 저 언덕에 오르리라. 그러기 위해선 어두울 때 길을 떠나야 합니다. 게으름에 때를 놓쳐 훤하게 밝은 언덕에 오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곳에 올라 붉은 나무숲을 밀쳐내며 오르는 해를 보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내 안에 자라고 있는 희망과 수고와 번민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깊은 이해로부터, 깊은 사랑으로부터, 깊은 감사로부터, 깊은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건 고난을 피해 가는 나에게 익숙해 질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관심이요. 얽어 매는 것이 아니라 부요하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계절이 짙어가는 하늘은 높고 숲은 아름다운 색깔을 품어내기 시작 했습니다. 모든 날의 주인은 당신이기에 나의 하루는 어김없이 당신 앞에서 깨어나고 저물어 갑니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가을. 촛불 하나 흔들리는 애처러운 가을 어스름입니다. 붉게 물든 단풍 아래 번지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발자국 밑에 쌓여가는 낙엽만큼 삶의 두께가 두터워짐을 실감합니다. 나희덕 시인의 ‘푸른밤’을 읇조리며 푸른밤을 걸어갑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 그 무수한 길도 /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 내 응시에 맑은 별은 /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내가 걷는 수만의 길은 오로지 먼 길을 돌아 당신에게로 향한 한 길 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길 위에 있습니다. 그 길이 언제 끝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 길 어딘가에 흔들리는 나의 걸음을 지긋이 바라보는 당신에게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나는 그 길을 갑니다. (시인, 화가) Nathan Park•Kevin Rho 기자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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